조선의 양반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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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2-11 11:32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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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균형 있는 문·무양반제도가 아직은 정착되지 못한 상태였다.
또한 무관은 문관에 비하여 差別(차별) 대우를 받았다. 군사통수원조차도 문관이 맡고 있었으며 문관이 군직(군직)을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예종 4년(1109) 7월부터 예종과 11년(1116) 정월까지 약 5년간 국학7재(국학칠재)의 하나로서 무학재(무학재)를 두고 일시 무과를 실시한 적은 있었으나 더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설명
신라시대에는 혈통으로만 신분을 구분하는 골품제(골품제)가 있었다. 따라서 문반은 문관이, 무반은 무관이 종사하는 관료군으로 구분된 양반제도는 없었던 셈이다. 다시말하면 문무관의 구별이 없었다. 생래적으로 성골(성골)과 진골(진골)은 왕족이었고, 6두품(육두품)은 귀족이었...
조선의 양반사회
신라시대에는 혈통으로만 신분을 구분하는 골품제(골품제)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문무산계는 당나라의 제도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기 때문에 고려의 실정에 맞지 않았다. 무반에는 2품이상직이 없었으며 무관은 재상(재상)이 되기 어려웠다.
골품제 하에서는 직능의 구별이 뚜렷치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는 문산계만 쓰였을 뿐 무산계는 제대로 쓰이지 않았다. 생래적으로 성골(성골)과 진골(진골)은 왕족이었고, 6두품(육두품)은 귀족이었으며 5두품(오두품)이하는 중앙과 지방의 관료였다.
관계(관계)뿐 아니라 과거시험도 문과(문과)와 잡과(잡과)만 있었을 뿐 무과(무과)는 없었다. 생래적으로 성골(성골)과 진골(진골)은 왕족이었고, 6두품(육두품)은 귀족이었... , 조선의 양반사회인문사회레포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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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에는 혈통으로만 신분을 구분하는 골품제(골품제)가 있었다. 그리하여 무관들은 불만이 많았다. 그후 고려 성종 14년(995)에는 당나라의 문무산계(문무산계)를 수용하여 비로소 문무반의 관계(관계)가 정해졌다. 따라서 고려후기까지 계속적으로 문산계의 개편만 있었을 뿐이었다. 무산계는 향리(향리)·노병(로병)·탐나왕족(탐나왕족)·여진추장(여진추장)·공장(공장)·악인(악인)들에게 변칙적으로 주어졌을 뿐이다. 고려 …(생략(省略))
다. 3두품(삼두품)이하가 있었는지 기록에는 없으나 일반인 이였을 공산이 크다. 문관과 무관이 다 같이 문산계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양반의 시원(시원)은 고려 경종 원년(976)의 전시과(전시과)로 소급된다 이때 관료군을 문반(문반)·무반(무반)·잡업(잡업)으로 구분하여 각 품에 따라 수조지(수조지)와 땔나무하는 시지(시지)를 분급했다.